눈이 아주 많이내렸던 1월 어느 날, 집에만 있어 눈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문득 확인해본 카톡에 눈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창문을 열어봤다. 많은 눈이 쌓여있었다. 부산 사람이라 그런지 눈이 쌓이면 참지 못한다. 이건 나가야겠다 싶어서 서둘러 준비를 했다. 동계 출장을 위한 방한 부츠까지 꺼내서 단단히 준비를 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눈이 아주 거칠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길까말까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무조건 챙겨야 했던 눈이었다. 우산을 펼치고 카메라 가방에서 겨우 카메라를 꺼냈는데 이렇게 눈 내리는 날에 카메라 꺼내는 건 처음이고, 찍는 것도 처음이었다.
한 손으론 우산을 들고 한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순간에 나온 건 거의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우산을 썼음에도 눈이 패딩에 쌓일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솔직히 재밌었다. 눈 맞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재밌다란 생각 반, 내가 정말 미쳤구나란 생각이 반이었다. 그 와중에 카메라는 패딩 안에 숨겼다가 꺼내서 한 컷씩 찍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 사진을 보면 진짜 이쁘게 잘 찍는데 찍고 보니 내 사진은 영화 '투모로우'같이 멸망 직전 같다. 하긴 내가 걷던 거리는 눈 내리는 낭만 가득한 거리보단 멸망 직전이 더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좀 걸을까 말까하다 방화수류정까진 가봐야지 싶어서 걸었다.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쌓인 눈은 내가 좋아하는 새 눈이었다. 눈 내리는 소리가, 눈 밟는 소리가 다 좋았던 성곽길.
화홍문 근처로 가서 바로 방화수류정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눈 내린 화홍문을 담고 싶어서 내려가서 돌담길 중간까지 갔다. 거의 처음 찍어보는 뷰. 처음 찍는 뷰를 눈이 담긴 뷰라니.
눈 내리는 순간에는 사람들이 많이 안 다니는 구나라는 걸 처음 알았던 날. 너무 폭설이라서 사람이 없었던 걸까.
용연은 이미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고 이 근처에 삼각대를 가지고 와 사진 찍는 사람이 두세명 보였다. 대단한 열정이 느껴졌었던 분들. 멋진 사진들 찍으셨겠지.
용연 근처에서 카메라가 꺼졌다. 눈을 맞아서 꺼진건지, 밧데리가 다 되어서 꺼진 건지 아리송하긴 했다. 창룡문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 볼까 하다가 다음 날 출장이 걱정돼서 돌아가야지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도 조용했으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며 오는 길은 낭만적이었다. 다시금 이런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이후 눈 내린 날이 몇 번 더 있었지만 일이 있거나 수원을 아예 벗어난 날이어서 이런 구경을 하지 못했다. 역시 할 수 있을 때, 할까 말까 고민할 때는 하는 게 현명한 듯하다.
수원에 살다 보니 제일 많이 가는 곳이 수원화성이다. 부산에 지낼 때는 광안리 바닷가를, 수원에선 수원화성을. 날씨가 좋거나, 바람이 알맞거나, 심심하거나 하면 일단 나가고 싶어 진다. 그것도 얼마 안 남은 늦가을 어디쯤, 또 다시 수원화성으로 향했다.
버스 내리는 곳은 장안문 근처. 장안문에서 용연쪽으로 걸을 것이냐, 화서문 쪽으로 걸을 것이냐는 그 순간의 선택에 맡긴다. 좀 걷고 싶으면 화서문쪽으로 가고, 멍 때리면서 쉬고 싶을 때는 용연 쪽으로 간다. 이번에는 좀 걷고 싶어서 화서문쪽으로 향했다.
삼각대 없는 준망원렌즈여서 손각대로 멀리멀리 있는 서장대도 찍어보고. 화각이 옛날 렌즈랑은 달라서 옛날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장면을 찍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이래서 많은 렌즈를 사람들이 사나 보다.
결국 화서문까지 걸어 걸어. 이왕 온 김에 조금 더 걸어 올라가 보기로 한다.
서북각루 바깥쪽 성곽길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을이 되면 여기 억새가 있다. 낮에도 이쁘고, 밤에도 이쁘다. 가을 낮의 억새 밭 앞에는 수많은 인증샷 찍는 젊은이들이 있다. 서로 찍어주는 젊은이들을 보면 참 좋을 때단 생각이 든다.
다시 걸어걸어 장안문까지. 삼각대를 귀찮아서 안 들고 갔는데 역시 밤에 찍으려면 필요한가 보다. 감도를 높여서 찍고 나면 찍는 순간엔 괜찮아 보이지만 막상 돌아와서 보면 아쉽다.
장안문 쪽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뷰. 북동포루/방화수류정/동북포루까지 한 번에 보이는 곳이다. 성벽이 괜찮게 뻗어져 있으며 그 사이사이 있는 포루들이 더 멋있게 만들어준다. 근처를 지날 때면 여기는 항상 찍는다. 생각보단 길게, 하지만 그렇게 많이 걷지 않은 날.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에 또 와야지란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