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치료를 마치고 수원화성으로 향했다. 치과에 가기 전, 화성에서 '수원 문화재 야행' 행사를 한다기에 갈까 말까 하다가 일단 카메라를 챙겼었다. 치과 치료가 빨리 끝나고 가봐야지 싶어서 수원 화성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화성 행궁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홀로 노래를 들으며 나도 돌아다니고 있었다.
조금 더 많이 돌아다닐까 하다 혼자인 게 그 날따라 너무 심심해 그냥 집에 가야지란 생각이 들었다. 버스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해가는데 왼쪽으로 내려앉는 노을이 너무 선명했다. 아쉬운 대로 장안문까지만 걸어가 보자 했다.
까만 하늘이 노을을 조금씩 덮고 있었다. 서둘러서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삼각대도 없이 성벽에 카메라를 고정하고 한 번씩 셔터를 눌렀다. 미세먼지 없는 한없이 맑은 날이었길래 바람은 조금 날카로웠다. 그래도 내려가는 붉은빛이 다 사라지기 전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화서역에 위치한 서호 호수. 지하철 역 출구와 바로 연결되어 있어 가기 편하다. 호수도 있고 마실 나가기 딱 좋은 공원. 옛날엔 자전거가 있어 가끔 갔었는데 자전거가 없어지니 가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 다른 약속에 가기 전 한 번 들렀다.
가을가을한 느낌이 약간 남아있었던 서호 호수 옆 공원. 어느 쪽 나무들의 잎은 벌써 많이 떨어졌었지만 한쪽에는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들이, 가을에 물들지 않은 잎들이 남아있었다. 서호 호수에는 트랙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실나와서 많이 걷는 곳. 트랙이 아닌 옆 연수원 쪽으로 걸으면 조금 멀리서 서호 호수를 볼 수 있다.중간에 다시 트랙과 연결되어 있어서 한번쯤은 걸어볼 만한 길.
서호 호수 입구 반대편으로 오면 흙길이 있고 아주 큰 노송이 있다. 몇 그루 있는데 무너지지 않게 철기둥으로 지지해 놓기도 했다. 이런 노송이 옆으로 쫙 펼쳐져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잠시 벤치에 앉아서 멀리 보며 멍 때리기. 가을이라 딱 좋아하는 정도의 바람이 불어왔던 벤치. 햇살까지 있어 그렇게 춥진 않았다.
흙길을 지나고 보면 다시 공원으로 연결된다. 코로나가 생기기 전에는 사람들이 잔디밭에 돗자리 펼쳐서 많이들 쉬었었는데. 사람들의 생활이 불과 몇 달 사이 많이 바뀌긴 했다.
서호 호수에서 철길 반대편으로 넘어갈 때. 햇살이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했는데, 햇살이 있는 순간을 남기고 싶었지만 기다려봐도 햇살이 다시 비춰주진 않았다. 육교를 건너고 계단을 내려가자 잠시 햇살이 비치더라. 역시 인생은 타이밍.
인터넷을 하다 문득 수원의 서울대 수목원이 일시적으로 오픈된다는 내용을 봤었다. 수원에 왜 서울대 수목원이 있지란 생각부터, 안 가본 곳이니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연구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가 이번에 일시적으로 오픈하였다고 한다. 올해는 끝났고 아마 내년에 다시 시작할 듯하다.
서울대 수목원에는 주차할 곳이 없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를 했다. 보통 탑동 시민공원에 많이 한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더 멀리 주차하고 좀 걸어서 왔다. 해설가 분과 같은 시간에 예약한 분들. 평일이라 그런지 아주머니 분들과 애들이 있었다. 시작 시간이 되고 설명과 함께 투어 시작.
수원의 서울대 수목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수목원이라고 한다. 해외의 다양한 나무들을 가져와 연구하기도 하고 오래된 나무들도 많다고. 서편과 동편으로 나뉘어 있는데 내가 구경한 곳은 동편. 서편이 더 넓다고 하셨는데 다음에 한 번 기회 되면 가볼 생각이다.
관리하고 있는 수목원이기 때문에 관람로가 아닌 길로는 갈 수 없다. 해설자 분과 함께 동행해서 같이 이어진 길로만 갈 수 있다. 차례차례 길 따라 있는 나무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걸어갔다.
초입에 자리하고 있던 미국풍나무. 한국의 단풍나무와 달리 잎 크기가 크다. 진짜 단풍국에서 온 나무라서 그런가. 역시 아메리카 스케일이 다르구나. 이 품종도 수원에 심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언젠가 이 나무로 둘러싸인 알려지는 거리가 나오겠지.
줄기가 여러 나무들로 희한하게 자라고 있던 뇌성목. 인상 깊은 나무 이름들을 노트에 적었는데 이 나무가 뇌성목이 맞겠지.
줄기 색깔이 색색별로 이뻤던 노각나무. 껍질이 이렇게 나나 신기했었다.
나무들이 엄청 많았기에 다양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많은 설명을 듣기도 하고, 열매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높은 나무부터 낮은 나무들까지, 다양한 스토리가 있는 나무들도.
그중에 꽃같이 이쁘고 마른 봉오리가 펴 있던 백합나무. 무엇보다 봉우리의 색깔이 맘에 들었다.
설명을 듣고 한 바퀴 쭉 돌고 나니 90분이 지나있었다. "걷기 좋았던 곳이었습니다." 한 줄의 관람평을 남기며 투어를 마쳤다.
수목원에서, 나무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들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비슷하게 생겨도 조금씩 다른 나무들이 많았고 나무도 알면 알수록 재밌는 거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점점 더 알아가 보면서 이런저런 색다른 나무를 찾는 것도 재밌을 거 같다. 사람이 아는 만큼 관심과 흥미를 가진다는 걸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방화수류정 밖 용머리 바위 아래에 주변의 경치를 살려 연못을 만들었는데 이를 용연이라 이름을 붙였다.
용연에는 전설이 있는데 옛날 옛적에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있었다. 이 이무기는 연못으로 놀러 나오는 소녀를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소녀는 발이 미끄러지며 연못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무기가 그 소녀를 구해주었다. 그 소녀는 용이 구해준 걸 알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이무기는 용으로 승천할 시간이 되었지만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소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옥황상제에게 도움을 청하자 두 가지 선택권을 줬다. 지상에서 사람이 되어 소녀와 살 것인가,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할 것인가. 이무기는 승천을 택하게 된다. 승천하는 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데 저 멀리 소녀의 집에서 소녀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환상이 들었다. 뭉클해진 용은 승천하지 못하고 용연으로 떨어지게 되고 용의 몸이 용연 옆으로 떨어져 언덕이 되고 머리 부분은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방화수류정
동북각루로 화성 동북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이다. 군사시설이지만 연못과 함께 있어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많이 쓰였다.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을 정조는 '현릉원이 있는 화산과 수원 읍치를 옮긴 땅 유천을 가리키는 뜻' 이라고 풀이했다.
옛날에 한 번 찾아봤었던 용연의 전설. 어디든 저런 전설이 있는건가.
멍 때릴 시간이 필요하면 방화수류정으로 가끔 찾아간다. 그냥 멍하니 앉아서 쳐다만 보고 있는다. 소풍 가기 좋은 곳으로 갑자기 핫해져서 사람이 많아졌지만 옛날에는 그렇게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나름 한적한 맛이 있었는데.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쯤부터 조명이 켜지고 조금 어두워질 때까지 노래 들으면서 앉아 있었다. 약간 찹찹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가만히 한자리에서. 이번엔 카메라도 챙겨가서 중간중간 한 컷씩 찍기도 했다. 그렇게 찍은 걸 시간의 흐름대로 한 번 꾸며보았다. 우연찮게 사진 중앙에 뜬 달까지 맘에 든 사진이 만들어졌다. 멍도 때리고 맘에 드는 사진도 남기고.
집에만 가만히 있다 보면 좀이 쑤신다. 그렇다고 그냥 동네 한 바퀴 하기엔 뭔가 아쉽다. 그러면 버스 타고 일단 수원화성으로 가본다. 뭔가 루틴이 된 거 같다. 밤의 수원화성이 이쁘기에 더 그런 걸 수도. 장안문쪽에서 내려서 방화수류정으로, 창룡문쪽으로 가면 걷는 시간만 하면 3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거 같다. 보통 천천히 성곽길의 불빛을 즐기기에 좀 더 오래 걸리긴 하지만.
날이 추울 땐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운이 좋으면 사람 하나 없는 사진을 찍어 볼 수 있다.
방화수류정에서 쪽문으로 나와 성곽길을 따라 흙길을 걷다보면 성곽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각도가 나온다. 많은 사진가들이 이 곳에서 삼각대를 세우고 찍고 있다. 꽤나 좋은 뷰다. 멀리 장안문에 화홍문, 방화수류정에 그걸 어울리게 덮고 있는 성벽까지.
성곽길 안쪽으로 걸어 멀리 동북공심돈과 동장대가 보인다.
동장대와 동북공심돈을 지나 창룡문까지. 생각보단 거리가 있지만 생각보단 멀지 않은 곳. 이 정도까지 걸어오면 시린 바람에 얼른 빨리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 성곽길이 아닌 도보로 가게 되면 조금 더 빨리 장안문 버스 정류장까지 갈 수 있다. 이것까지 한 루틴이 돼버린 거 같네.
수원에 살다 보니 제일 많이 가는 곳이 수원화성이다. 부산에 지낼 때는 광안리 바닷가를, 수원에선 수원화성을. 날씨가 좋거나, 바람이 알맞거나, 심심하거나 하면 일단 나가고 싶어 진다. 그것도 얼마 안 남은 늦가을 어디쯤, 또 다시 수원화성으로 향했다.
버스 내리는 곳은 장안문 근처. 장안문에서 용연쪽으로 걸을 것이냐, 화서문 쪽으로 걸을 것이냐는 그 순간의 선택에 맡긴다. 좀 걷고 싶으면 화서문쪽으로 가고, 멍 때리면서 쉬고 싶을 때는 용연 쪽으로 간다. 이번에는 좀 걷고 싶어서 화서문쪽으로 향했다.
삼각대 없는 준망원렌즈여서 손각대로 멀리멀리 있는 서장대도 찍어보고. 화각이 옛날 렌즈랑은 달라서 옛날엔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장면을 찍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이래서 많은 렌즈를 사람들이 사나 보다.
결국 화서문까지 걸어 걸어. 이왕 온 김에 조금 더 걸어 올라가 보기로 한다.
서북각루 바깥쪽 성곽길로 올라갈 수 있는데, 가을이 되면 여기 억새가 있다. 낮에도 이쁘고, 밤에도 이쁘다. 가을 낮의 억새 밭 앞에는 수많은 인증샷 찍는 젊은이들이 있다. 서로 찍어주는 젊은이들을 보면 참 좋을 때단 생각이 든다.
다시 걸어걸어 장안문까지. 삼각대를 귀찮아서 안 들고 갔는데 역시 밤에 찍으려면 필요한가 보다. 감도를 높여서 찍고 나면 찍는 순간엔 괜찮아 보이지만 막상 돌아와서 보면 아쉽다.
장안문 쪽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뷰. 북동포루/방화수류정/동북포루까지 한 번에 보이는 곳이다. 성벽이 괜찮게 뻗어져 있으며 그 사이사이 있는 포루들이 더 멋있게 만들어준다. 근처를 지날 때면 여기는 항상 찍는다. 생각보단 길게, 하지만 그렇게 많이 걷지 않은 날.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에 또 와야지란 생각을 한다.
눈이 오는 날이 그리 많지 않았다. 부산을 벗어나면 눈을 많이 볼 줄 알았는데 군대 말고는 그렇게 많은 눈을 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눈이 내린 날, 아니 내려서 그쳤던 어느 점심이었다. 조금이라도 눈 내린 거리를 보고 싶어서 수원 화성으로 향했다. 많이 내리지 않아 녹았을까, 괜히 가는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화서문 근처에서 내려서 걸었다.
눈이 아주 소박하게 쌓여 있었다. 좀 펑펑 내려서 쌓인 눈을 밟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눈이 잘 안오는 듯 하다. 눈이 내렸지만 그렇게 많이 춥진 않았다. 눈이 내릴 땐 포근하게 느껴져 더 그런가 보다. 근처를 서성 거리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눈이 내리긴 했지만 늦게 가기도 했고 많이 내리지 않아 쌓이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첫눈이라 좀 더 이쁜 배경을 기대했었는데. 눈이 많이 오면 나가기 싫고, 눈 풍경을 기대하면 쌓이는 날이 없는거 같고. 상황과 반대되는 것을 기대하는 건 변치 않는 듯하다.
눈 오기 전에 찍었었던 북동포루 야경과 눈이 있는 북동포루. 한창 똑같은 장면을 찍고 반반치킨처럼 편집하는 것에 맛들려서 해봤었다. 그 전에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높이로 찍었었지를 떠올리며 비슷하게 찍으려고 몇 컷을 찍었었다. 그런 두 사진을 합쳐보면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뭔가 많이 안 어울리는 대비. 다른 느낌을 섞는다는 게 쉽진 않다. 그래도 이 사진은 한동안 폰배경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진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산책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춥지 않았지만 역시 겨울은 겨울.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하고 돌아갈까, 좀 더 걸을까 고민하다 언제나 같은 선택인 좀 더 걷자를 택했다. 눈 내리는 날을 맞이하는 게 쉽지 않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어느 누군가 길거리도 아니고 자전거 보관대도 아닌 성벽 아래 눈덮이기 전에 세워둔 자전거. 공유 자전거같은데 이렇게 해도 되는건가.
결국 걷다걷가 방화수류정, 용연까지 갔었다. 딱 이정도. 화서문에서 장안문을 거처 방화수류정까지. 항상 걷는 코스. 잘 걸었다.
걷기 좋은 성곽길과 낮, 밤, 날씨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보기 좋은 풍경. 수원에서 제일 걷고, 보기 좋은 곳은 수원화성인가 싶다. 언제 또 눈 덮인 수원화성을 보려나. 눈이 내린다고해서 갈 수 있으려나.